이민에 관한 모든 질문 받습니다





오늘 저녁에 부모님 댁에서 어머니 그리고 저의 바로 아래 동생과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머니와 제 동생은 모두 나름대로 우리나라 역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온 분들입니다.

지난주에 어머님이 교회 노인학교에서 병자호란과 인조에 대한 특강을 하셨다면서

그 내용은 이렇고 이런 것이었는데,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머니와 제 동생은 모두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를 조선조 5백년 역사에서 최악의 왕 중 하나로 여깁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제가 중고등학생 때 배운 역사에서는 광해군은 폭군이고 인조(仁祖)는 한자의 뜻처럼 어진 임금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 평가가 완전히 바뀌고 있음을 저는 여러 번 실감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절대 인조가 어진 임금이거나 뛰어난 임금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래에 유행처럼 번지던 광해군 띄우기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인조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내쫓은 명분에 대해서도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교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조가 21세기 한국에서 맹비난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이 발생한 것이 전적으로 인조와 집권 서인들의 책임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 저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열변을 토했고,

거기에 대해 어머니와 동생은 썩 내키지는 않지만 다시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필 받은 김에 제가 말한 내용을 쓰려고 합니다.


병자호란의 발생과 그 직후에 벌어진 극도의 무기력함에 대한 책임이 인조와 집권 서인에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수많은 역사책과 연구논문에서 당시 집권층의 잘못된 판단, 허술함과 무능무책임 등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어,

파헤칠수록 당시 조선이 입은 피해의 거의 모든 것이 인조와 집권층의 책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입니다.


만일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고 그때까지 집권했다면 그가 구사한 절묘한 외교정책으로

병자호란 같은 참사를 원천적으로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많은 학자들과 저술가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동생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르하치(努爾哈赤, 노이합적)가 이끄는 건주여진은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주변의 여진족들을 차례로 복속시켰고 1613년에 여진족 대부분을 통일했습니다.

광해군 8년인 1616년 누르하치는 국호를 대금(大金, 이하 후금)으로 정하며 건국하였고,

그 이후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명군에 원병을 보내 후금과 싸울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심하에서 조선군은 후금 군대와 격전을 벌여 수많은 장병을 사살했습니다.

하지만 명군이 섬멸되고 조선군이 겹겹이 포위된 상태가 되자 원병을 이끌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에게 항복했습니다.


강홍립의 항복은 실제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광해군의 심중을 헤아린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극적인 양면외교를 펼쳐 명의 의구심을 풀어주면서도 후금을 자극하지 않았고,

후금과의 교역도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인조가 집권하기 바로 전 해인 1622년

후금의 광녕 정복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육상통로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1623년 인조가 즉위한 후에도 후금은 팽창을 계속했습니다.

육상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 쪽으로 기우는 것을 더더욱 경계했고,

후금은 명과의 전쟁을 위해서 조선과의 관계를 먼저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627년 후금이 조선을 느닷없이 침략한 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궁궐을 짓느라 파탄 낸 재정도 복귀가 안 되었고,

방치했던 군비도 정리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화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전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정묘호란부터 병자호란 사이에 약 10년 동안 조선과 후금은 혼란스러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두 나라 간의 가장 큰 갈등은 명나라와 동등한 예우를 요청하는 후금과 이를 거부하는 조선 사이의 불신이었습니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정변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입으로만 척화정책을 썼을 뿐 실제로는 후금과의 적대관계를 피하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1633년 조선과 후금의 국교단절 위기도 누르하치의 대를 이은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 황태극)가

조선에게 남조(명)와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며 절사의 통첩을 보낸 것입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청의 요구에 화가 치밀었지만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관계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누르하치의 사망 후 왕위를 이어 받은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는

여진족의 전통에 따라 지도자들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었고,

나이 많은 형들은 자리에 앉을 때도 왕보다 상석에 앉는 등 홍타이지가 즉위 할 당시 후금의 왕실은

전래의 부족 수준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왕이었지만

8기군 중에서 2기만 지휘할 수 있었기에 그의 권력은 반토막에도 못 미치는 네토막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빠른 속도로 세력을 늘였고,

아버지 누르하치는 꿈도 꾸지 못했던 명(明)을 대신할 새로운 제국을 꿈꿨습니다.

그는 혼인을 통해 몽고와 연합함으로써 원(元)제국의 황제였던 쿠빌라이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중권 제패를 선언했습니다.


나이 47세이던 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홍타이지가 즉위식을 올릴 당시 축하사절로 간 조선의 이곽, 나덕현 등은 그에게 황제의 예를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만일 군신지맹으로 황제의 예를 올리는 경우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반역죄로 일가족이 몰살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을 벌하는 대신 그들을 귀국시키면서

자신은 쿠빌라이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던 것처럼 조선은 청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조를 책망하는 서한을 보내 조속한 시일 내에 회답과 함께 인질을 보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청의 홍타이지는 명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던 이전의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선은 청을 유일하게 섬겨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조선은 이제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고 청의 신하국이 되느냐 이를 거부하느냐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였으며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홍타이지의 서신을 묵살한 채 회답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요구를 조선이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해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의 조정이 취한 어리석은 정책이 병자호란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청나라가 느닷없이 군신 관계를 요구하면서 침략한 것이 병자호란입니다.


물론 조선이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들을 유일한 황제국으로 섬겼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명을 배반하고 새로 청을 섬긴다는 것은 조선의 외교정책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고

조선의 건국이념과 유교사상, 정치와 문화 그리고 사회 운영의 구석구석에 이르도록

긴밀히 짜여진 틀을 깨는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의 조정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막말로 필부도 주먹질하며 협박한다고 아무에게나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데,

하물며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살던 자존심 높은 나라에서

죽기 살기로 싸워보지도 않고 청을 유일한 황제국으로 섬길 수는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당시에 집권했더라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광해군시절 집권하던 대북파는 인조시절 서인들 못지않은 명분론자들이었습니다.

광해군과 대북파라고 할지라도 청으로부터 양자택을을 요구받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보낸 서한에서 “너희들의 조상이 원제국을 섬겼듯이 너희들도 대청제국을 섬기라.”고 했는데,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조선과 고려는 명백히 다른 나라고,

원이 아니라 명을 섬기는 것이 조선 건국의 한 명분이었기에 홍타이지의 서신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도를 지키며 사직을 지키며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인조실록에 적혀 있는 당시 이조참판 정온의 말은 당시 조정이 처했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조선이 현실에 눈을 감은 채

자신들만의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 대신 열린 마음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예의 주시했다면, 

여진족이 중원의 주인이 된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테고

훗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기는커녕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을 것이다.”

어머님 댁에서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그 책의 주장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의 시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명실상부한 중화의 주인이며 임진왜란 때 은혜를 준 명제국이

천하질서를 위협하는 오랑캐를 결국 물리칠 것이라는 게 오히려 당시의 합리적인 사고였을 겁니다.

만일 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청을 요구를 들어줬는데, 명이 청을 토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조선은 그 즉시 망국의 길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당시 사람들에게 안 떠올랐을 리 없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만 해도 명은 여전히 강국이었고 천하의 중심도 여전히 명이었습니다.

청이 결국 중원의 임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사람에게는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글의 요지는 병자호란의 발발과 삼전도의 치욕은

온전히 인조와 집권 서인들만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인조는 어질지도 않고 유능하지도 않은 임금이었습니다.


인조실록에는 삼전도의 굴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산성일기나 병자일기 등의 자료를 살펴봐야 합니다.

인조는 항복하기 전에 수시로 사람을 보내 항복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며 두려워했습니다.


산성일기에 따르면 항복의식을 거행할 당시 홍타이지가 단 위의 의자에 앉자

인조는 진흙 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하려 했습니다.

신하들이 읍소하며 돗자리를 깔기를 청하자 인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히 황제 앞에서 어찌 스스로 높일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글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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